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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8] '밤 새지 마란 말야!'글 2020. 11. 28. 11:24
1997년 컴퓨터 광고 카피에 '밤 새지 마란 말야!'란 게 있었죠. PC통신과 인터넷이 도입될 당시, 전화선을 이용한 56K의 속도로 밤을 새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인터넷이라는 신세계가 도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밤 새워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은 밤 새우는 심정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막 13:33-37절까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4번이나 반복됩니다. 깨어 있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밤새워 도박을 하는 사람도 깨어 있기는 합니다. 밤새워 인터넷 게임을 하는 사람도 그렇구요. 세계 주식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서 깨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적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며칠 밤을 새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서가 이런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철야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특새'에 참석하려고 새벽 두 세 시에 일어나는 이들도 많습니다. 예배도 많고, 성경읽기와 공부도 많습니다. 스물네 시간 릴레이식으로 기도 모임을 이끌어가는 교회도 제법 된다고 합니다. 유럽 교회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는 교회가 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런 신앙의 형식으로만 말하면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모범적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대한민국 교회가 깨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대개 알 만한 분들은 다 알고 있을 터이니 그 이유를 여기서 일일이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종말의 때, 재림의 때와 연관됩니다. 그냥 무턱대고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를 향해서 우리의 영혼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때'는 고사하고 삶에 집중하기도, 예배에 집중하기도 힘듭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자아와 욕망을 강화시키는 힘들로 인해서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사태가 반복되면 우리는 영적으로 완전히 무감각해지겠지요.
성서학자 로마이어는 '깨어 있으라'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의 생활은 졸거나 꿈꾸거나 도취하지 않고 마음이 언제나 깨어 있고 각성된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
출처 : 『진리에로 이끄는 질문들, 마가복음을 읽는다2』, 정용섭, 홍성사, p. 460.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대림절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유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완성하실 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크고 결정적인 기다림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기자와 동일한 심정으로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기 원합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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