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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5] 4월 둘째 주간(4.10-16) 사역일지사역일지 2022. 4. 13. 09:22
1. 4월 10일(日) :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 주일성결회 설교 『도우시는 하나님(사 50:4-9)』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본문의 이사야의 종의 노래 3편에 해당합니다. 종의 노래는 사 42:1-4절, 사 49:1-7절, 그리고 오늘 본문 이렇게 3개라고 합니다. 혹자는 사 52:13-53:12절의 제 4편으로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본문의 배경이 유대가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걸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거기서 자식을 낳고 살면서 그만 하나님의 백성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 오늘 사는 현대인들 역시 현대 문명에 끌려 우리가 피조물인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건 아닌지요? 종의 노래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이사야와 같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이런 노래를 부른 이사야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될 것이기에, 우리는 지금부터 미리 종의 노래를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종의 노래가 가리키는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야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4월 11일(月) : 오늘은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로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하루였습니다. 어제도 날씨가 좋아서 주위에 벗꽃이 만개했는 데, 오늘은 절정에 이를 것 같습니다. 고난주간 특새 첫째 날, 『하나님의 정의(사 42:1-9)』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본문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성서일과 본문에 따랐습니다. 종의 노래 1편에 해당하는 본문으로 첫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참고 도서는 차준희 교수님의 『6개의 키워드로 읽는 이사야서(성서유니온)』를 계속 활용 중입니다.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구약학자들의 많은 연구가 있어 왔습니다. 결과는 ‘그 종이 누군지 모른다’입니다. 만약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정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면 이사야서에서 분명히 언급되었을테지요. 그러나 이사야서는 이 종을 익명으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누구’라는 물음보다 ‘어떤 삶’이라는 물음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종의 정체가 아니라 종의 삶과 사역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최종 결론입니다." 오전에 단국대 천안치과병원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합덕제에서 벗꽃 구경과 함께 조깅을 하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한 낮에 기온이 20도를 윗도는 약간 무더운 날씨여서 많이 놀랐고, 많은 사람들이 벗꽃 구경을 하러 나온 걸 보고는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곧 코로나 방역수칙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3. 4월 12일(火) : 박*성 부교님, 홍*화 부교님 동부인께서 새벽기도회를 출석하셨습니다. 어젯 밤 홍부교님은 교회에서 주무셨네요. 이런 광경을 참 오랫만에 보았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서 주무시는 부교님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내를 돌보시는 박 부교님의 마음도 참 보기 좋았습니다. 이래저래 이번 고난주간은 코로나 절정으로 잠시 머뭇거린 사순절의 부족함을 잘 채워주고 있는 듯 합니다. 고난주간 특새 둘째 날,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사 49:1-7)』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종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개인의 주권과 자유가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종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주인을 향한 절대 순종, 절대 의존, 절대 신뢰입니다. 이게 없으면 종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이런 성격이 겉으로는 부정적으로 들리겠지만 이사야에게는 절대적인 긍정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기를 대하는 태도가 이와 비슷합니다. 사람은 공기에게 절대 순종하고 절대 의존하고, 그리고 공기를 절대 신뢰합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그런 대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대상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현대인들이 매 순간 흔들리는 이유는 절대적인 대상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절대적인 않은 대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경험했기에 자신을 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모두가 주님의 종으로 살기 원합니다. 수요저녁예배, 『정의의 길을 걷다(사 42:1-4)』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유명한 기도원 저녁 집회에 강사진를 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주강사는 당연히 그 기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상에는 이미 다른 강사들이 몇 분 앉아 계셨기에 주강사인 원장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자는 강사들을 차례로 ‘주의 종님’이라는 관용구를 붙여 소개했습니다. 드디어 메인강사인 대형교회 당회장 목사이자 기도원장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지금 막 주의 위대하신 대종님이신 목사님이 올라오십니다.” ‘대종님’과 같은 극존칭어는 국어사전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종’의 의미를 망각하는 표현입니다. 호칭만 종이라고 부르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극진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어찌 주의 종일 수 있겠습니까?
4. 4월 13일(水) : 고난주간 특새 셋째 날, 『나를 건지소서(시 70:1-5)』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시 70편은 시 40:13-17절과 거의 같습니다. 시편에 이런 본문이 반복된다는 건 우리네 인생에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된다는 뜻이죠. 시편 40편의 시인처럼 오늘 본문의 시인의 마음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절에 ‘속히’라는 말로 시작해서 5절에 ‘지체하지 마소서’라는 말로 기도를 끝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긍정으로 뒤에서는 부정으로 빨리 구해 달라는 간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구원에 대한 절박함이 오늘 우리의 동일한 고백 되기 원합니다.5. 4월 14일(木) : 어제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새벽에도 빗방울이 날렸습니다. 날씨도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새벽 5시 10분이 되면 예배실로 올라가는 데, 노부교님 동부인이 일찍 나오셔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지만 덕분에 큰 힘이 되고 더 분발하는 계기가 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고난주간 특새 셋째 날, 『발을 씻기다(요 13:1-17)』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본문의 배경인 세족식은 다가올 어떤 사건을 보여 주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집에 창문을 다는 이유는 창문을 구성하는 재료를 볼려고 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창문을 구성하는 재료인 유리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는 바깥 풍경입니다. 세족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족식에 준비된 대야, 물, 수건보다 그것이 보여주는 무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하루 전날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발을 씻긴 사건 뒤에는 이 사건이 보여 주는 어떤 세계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 세계를 가리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방향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다가올 십자가 사건입니다. 세족식은 다가올 십자가 사건의 전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 씻음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빛의 자녀가 되기도 하고 어둠의 자녀가 되기도 합니다.
6. 4월 15일(金) : 고난주간 특새 다섯째 날, 『하나님께 가까이(히 10:19-25)』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본문에는 낯선 단어들이 나옵니다.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말씀을 그저 익숙하게 여기기보다 오늘 본문처럼 낯설게 느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예수의 피, 성소, 휘장, 큰 제사장, 마음에 뿌림, 악한 양심, 물로 씻음, 믿는 도리, 그 날이 가까움, 이게 다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머리에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집니까? 이런 단어들이 가리키는 기독교 신앙의 세계를 경험해 볼 수 있기 원합니다. 오후에 50일 전도운동 계획(안)을 지방본영에 제출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합덕영문이 영적으로, 외적으로 더욱 부흥 성장할 수 있기 원합니다. 구세군 사회복지 세미나가 다음 달 5월 16일(月)부터 17일(火)까지 열리게 되어 담임사관은 어린이집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7. 4월 16일(土) : 고난주간 특새 여섯째 날,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1-8)』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전에 주보 출력 및 부활주일 설교문 작성을 마무리 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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