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9] '영원히' 찬양하리!
우리는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영원히' 찬양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운데 "Be Still for the Presence of the Lord"란 곡이 있습니다. 번악곡 제목이 "주의 임재 앞에 잠잠해"란 곡인데 원곡은 가톨릭 성가였다고 합니다. 제목을 번역해 보면 '주의 임재하심이 여전하시다, 즉 영원하시다'란 뜻이죠. 주님을 '영원히' 찬양한다는 건 제게 주님을 '여전히', '변함없이' 찬양한다는 의미로 남습니다.
시편 71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다윗의 안타까운 고백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의 위협이 얼마나 심했기에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건지시고 살리실 이가 바로 하나님임을 깨닫기 시작한 다윗의 고백은 점점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이 시 71편에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다윗과 비슷합니다. 젊었을 때는 혈기 왕성해서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지만 나이가 들어 철이 들면 눈 앞에 것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걸 볼 수 있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우리를 철들게 하고, 자유케 합니다. 넉넉하게도 합니다. 어디 한 군데 매달리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늙음의 과정이 순조롭고, 진지하고, 또 바르게 가야만 마지막 문턱인 죽음마저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늙어 간다는 것은 신앙적인 모습과 비슷합니다. 바로 젊었을 때 가졌던 모든 욕망들을 줄여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시력과 청력이죠. 노욕으로 욕심이 과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 늙을수록 자세하게 볼 수 없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설계하신 게 아닐까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더 살고 싶다, 더 먹고 싶다, 더 마시고 싶다 이런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삶이고, 가장 불행한 죽음인 것 같습니다. 결국 죽으면 모든 것들과의 단절인데, 실제적으로 죽음에 이르기 전에 모든 것들로부터의 단절을 순순하게 미리 받아들이는 그런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광야와 같은 저 합덕제를 산책하러 나갑니다. 겨울 합덕제에서 홀로 찬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건 제게 세상과의 단절 연습이자 홀로 주님을 찬양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을 '영원히' 찬양한다는 건 제게 주님을 '광야에서', '홀로 찬양한다'는 의미로 남습니다. 주님의 평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