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 '구원'을 논(論)하다.

합덕 담임사관 2022. 1. 21. 23:00

구원이란 종종 돈에 비유됩니다.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요? 요즘은 십원짜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약 100년 전 만 해도 10원은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구원은 10원에서 바로 1원이 모자라는 액수죠.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냐고 하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돈으로 구원을 사려는 게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예수 믿고 천당간다’로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구원은 좀 다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돈 많이 벌고 성공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자리를 얻으려고 하는 게 오히려 구원의 실체와 가깝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구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기독교는 사회의 모든 행위들과 구원론적인 면에서 경쟁하고 있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인간 행위 자체가 구원론적이라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과학,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예전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연장하는 게 바로 구원론적이라는 뜻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더 이상 동굴 같은 곳에서 사는 게 아니라 좋은 집, 좋은 자동차, 좋은 옷을 입고 사는 게 모든 사람들의 목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세계 GDP 10위 권 안에 드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여전히 바닥인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윤홍식 교수의 『이상한 성공』이라는 책에 보면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지만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어버렸다” 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특권층만을 향한 잘못된 복지정책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한국 교회 역시 잘못된 구원론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부흥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구원의 출발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념(신념)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죄를 교만이라고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죄를 자기애라고 했으며, 판넨베르크는 죄를 자기 집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니는 교회를 구원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자기가 아주 작아지는 경험, 구세군찬송가 680장 3절 가사에 나오듯이 “주 앞에서 우리는 모두 없어지고 주님 홀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내가 철저히 작아지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는다거나 무조건 아멘한다거나 무조건 기도하면 된다는 식의 자기 암시나 자기 최면이나 자기 세뇌에 걸려 있으면 내가 너무 커져서 결코 신앙의 실체를 맛볼 수 없습니다.  

 

2022년 1월 24일(月)에 있을 <Corps Cadet Academy> '구원론' 강의 원고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