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21] 수요예배 설교문 도입
오늘 우리는 부활절 제3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에 부활하셨다는 전통에 따른 겁니다.
그런데, 실상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특히, 한국교회는 부활절 한 주일만 요란하게 행사를 치르듯이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맙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처럼, 교인들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별로 관심을 갖지 못합니다.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대부분 그렇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주제로 하는 깊이 있는 설교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부활절은 한 주로 끝내버리고, 곧바로 기존의 주관심사인 교회성장, 축복, 병 나음, 도덕적인 변화 등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어찌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뿌리고 핵심이라면,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 생활을 교회 생활과 함께 열심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모든 게 그렇듯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교회 생활을 통해 얻는 만족이 아닙니다.
하물며 신앙 생활은 어떤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머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 즉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단순히 예수님을 입술로 영접한다고 말함으로 얻는 일회성의 주문 같은 게 아닙니다.
구원은 곧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부활을 우리네 삶의 주제이자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다행스럽게도 제가 만나는 주위 사람들과 부활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아내인 이향숙 사관과 부활을 주제로 자주 대화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실랄하게 합니다.
누가 들으면 ‘부활을 믿기는 하는 거야’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당연히 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더 나아가 성서에 다 기록하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것인지를 늘 생각합니다.
신학은 성경 한 줄 한 줄 사이에 숨겨진 것을 탐구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정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늘 고민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부활을 우리가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활은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실제 부활 신앙 없이 얼마든지 세련된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이 세상의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려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부활 생명이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일가요?
부활을 믿는 사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어찌 함부로 비난할 수 있겠으며, 공연한 일로 쉽사리 다툴 수 있겠습니까?
부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세상 일로 그렇게 절망하거나 좌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부활 생명으로 오늘도 당당히 세상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