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6] '이거 내 일 아냐!?'
"이거 내 일 아냐. 니 일이야."
제가 좋아하는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멋진 대사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얘기를 종종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게 내 일이라면 밤을 새워 하는 게 마땅한데,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은 당연히 누가 해야쥐. 내 일 아냐."
말은 이렇게 해놓고, 막상 자기 일임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우는 이는 잘 없더라구요.
살다보면, 지금 내가 힘들게 하고 있는 일이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굉장히 억울하고, 심하면 분노가 끓어 오릅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내 일이 아닌 것에 민감할까요?
아니, 왜 남의 일에 관심이 없을까요?
내 일을 누가 방해하거나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을 내가 조금이라도 하고 있으면 분노할까요?
내 일과 남의 일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 말씀 중에 '하나님의 일'에 대한 소스를 얻어 공유합니다.
이어지는 구분선 아래 내용도 천천히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내 일이냐, 남의 일이냐를 따지기 전에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타 투 테우)'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깨닫고 나면, 내 일이 아닌 걸 내가 좀 하더라도 결코 억울하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보낸 이들이 자신을 책잡으려고 제기한 세금 납부에 관한 질문 앞에서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의 답변은 세금 납부 여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신 것이라고만 볼 수 없다. 이는 예수님이 보이라 하신 후 지적하신 데나리온의 "형상"과 "글"에는 우상 숭배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은 우상 숭배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떠나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쳐야 할 "하나님의 것(헬. 타 투 테우)"과 동일한 표현이 앞에도 나온다(막 8:33).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헬. 타 투 테우)"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가이사(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에 그가 가져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예수님이 지적하신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사람의 일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분리하면 곤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본문이 굳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는 이유는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사람의 일’은 이스라엘인들의 전통에 묶이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들의 전통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검증된 것이라서 누구나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 윤리, 규범, 질서 등은 어디서나 필요합니다. 그것이 잘 발달되고 작동되는 사회를 가리켜서 문명사회라고 보통 말합니다. 이런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이스라엘을 추동해가는 원리였습니다. 그들에게 인정받아야만 안정적인 삶이 보장됩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일은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전통을 넘어서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아무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 1:23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미련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일에만 마음이 쏠려 있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에 묶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합니다. 삶의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운명은 다 불행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런 운명에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운명을 막아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런 운명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저주스러웠던 운명으로부터 가장 거룩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을 순전히 교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난과 소외와 고독은 한편으로(사람의 일) 우리의 삶을 파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하나님의 일) 삶을 완성합니다. 혼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의 세계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실질적으로 느끼려면 혼자 아니면 안 됩니다. 우리 집 마당의 소나무 다섯 그루와 하나 되는 즐거움도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책과 시계와 컴퓨터와 책상 등이 배치된 제 서재의 공간을 깊이 느끼려면, 이럴 때만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히는데, 당연히 혼자여야만 됩니다. 고난과 버림받음이 겉으로는 외롭지만 속으로 자유롭습니다. 이 자유가 가장 중요한 생명 현상이기에 저는 남은 인생을 혼자 지내고 싶습니다. 아직 젊어서 그렇지 더 늙으면 외로워질 거라고 말할 분들이 있겠지요. 그래서 자식들이나 지인들이 찾아와주기를 바랄 거라고 말입니다. 지금 집사람과 둘만 지내지만 불편하거나 외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걸 보면 나이가 더 들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집사람도 저와 비슷하게 생각해서 다행입니다. 내가 먼저 죽으면 집사람의 생각이 달라질지는 제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나이가 들면 자식들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이 떠남으로써 더 자유로워진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고독해야만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절정을 점점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고독해야만 경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영성가들, 시인들, 예술가들이 다 그런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이 문제는 목회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저는 평생 작은 교회에서 목사 생활을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기회가 주어지면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에서 소신껏 목회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회를 잡으려면 나름으로 교회 정치를 해야만 합니다. 결국 저는 목회 현장에서 버림받은 것입니다. 목사들 모임에 자주 나갈 필요도 없고,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연수받으려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고, 중대형 교회 담임 목사로서 감당해야 할 온갖 행정적인 것들과 사람관계에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더 좋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책도 더 읽고, 공부도 더 하고, 삶에 더 천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외로우니까 정말 중요한 것에서 풍성해진 겁니다.
* 참고 : http://dabi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