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30] 예수, 귀신을 내쫓으시다(막 1:21-28).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아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식일의 핵심은 곧 안식(安息), 즉 편안하게 쉰다는 데에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편안하게 쉰다는 것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노동의 강도가 오늘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던 고대인들이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그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의 날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안식일에는 노예도 쉬어야만 했고, 심지어 가축까지 쉬어야만 했습니다. 일절의 노동 행위를 멈춰야 했습니다.
오늘의 교회의 주일은 안식일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주일은 안식의 날이 아니라 평소보다 훨씬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날입니다. 새벽기도회부터 시작해서 여러 번에 걸친 예배와 각종 모임, 행사를 마치고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목사는 다음 날 쉰다고 하지만 평신도들은 월요일부터 세상의 노동 활동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고강도 노동을 수반하는 신앙생활을 보면 놀랍습니다. 신앙생활은 기본적으로 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참된 쉼을 주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거운 짐은 단순히 먹고사는 수고가 아니라 그 당시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에게 참된 쉼을 제공해야 할 유대교가 온갖 율법과 시행세칙을 통해서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종교적, 도덕적 업적을 쌓는 일보다는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참된 쉼의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신앙이 또 하나의 율법으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요? 신앙생활에서 영적인 쉼을 얻고 있는지 질문해 보십시오. 일단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참된 안식을 방해하는 요소인지 살펴봅시다. 오늘 신앙생활이 행사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온갖 종류의 이벤트가 생산되고 거기에 시간과 물질이 투자되고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내용을 무늬만 바꿔 가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신앙생활에 익숙해진 신자들은 행사를 하지 않으면 어딘가 허전해합니다.
예배 이외의 행사를 교회에서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놀러 다니느라 예배에 빠지고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행위를 두둔하는 말도 아닙니다. 가능한 대로 의미 있는 행사들을 알차고 정성스럽게 계획해서 실천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말도 아닙니다. 한국 교회에는 그야말로 행사를 위한 행사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계절이 되었으니까 대심방과 부흥회를 열어야 하고, 총동원주일도 지켜야 하며, 각종 기도회에 참여하고 지도자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교회 형편에 따라서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 흐트러진 교회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한 것들도 제법 많습니다.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의 행사가 과도하게 많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쟁하듯이 교회 행사를 벌리는 이유는 참된 안식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그런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말이 아닐런지요. 하나님의 은총을 일상에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안식은 참된 쉼입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인간의 행위를 멈추어야 합니다. 안식은 모든 걸 멈추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때 안식의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 모든 것에는 상당한 경우 교회 일도 속합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현재 교회에서 맡고 잇는 일들을 모두 포기하더라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장로, 안수집사, 서리집사, 권사, 성가대장, 주일학교 부장, 구역장 등등. 이런 일에서 손을 놓아도 역시 뜨거운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모두 손을 놓으면 누가 교회를 꾸려갈까 염려할지 모릅니다만 한국 교회가 조용해지려면 교회 일에서 손을 놓는 사람들이 많아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사건만으로 우리의 삶에 희망이 가득해야 합니다. 이게 곧 안식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이 이런 안식을 두려워합니다.
☞ 출처 : 『마가복음을 읽는다 1 - 적은 무리여 기뻐하라』, 정용섭, 홍성사, pp. 9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