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6] 착각은 자유(?)
사람은 착각의 동물입니다.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입니다. 착각에서 깨어나면 내가 처한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데 이전보다 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착각이 고정되면 편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해야할 것은 성서를 잘못 해석해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한국 교회는 성서를 읽는 데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에 많이 의존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엄격히 축자영감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나 칼뱅은 성서의 문자 자체를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안타깝지만, 한국 교회는 '축자영감설'을 넘어 '문자주의(文字主義)'에 빠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을 '문자주의'로 해석하면 매우 곤란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김민기님의 '아침이슬'이란 명곡이 군사독재 시절 금지곡이 된 것이 바로 그 예입니다.
'작가의 의도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게 독자의 과제입니다. 작가는 효율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창작하고 편집합니다. 그 속엔 은유, 직유, 비유 등 독자를 향한 작가의 세심한 배려가 녹아있습니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톨스토이의 ‘부활’,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러시아 소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를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철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역사적 배경과 인간의 심리를 철저하게 분석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작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독자도 작가의 노력을 어느 정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오히려 우리네 삶의 본질을 알게 하고, 현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 성경에는 예언서, 묵시록 같은 게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데살로니가전서 4:13-18절의 핵심은 종말에 대한 묵시문학적 묘사라는 겁니다. 저자는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문학, 역사, 철학, 신학을 두루 섭렵한 사도 바울입니다. 물론 사도 요한도 이와 비슷한 걸 남겼으니,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이죠. 그럼, 본문에 나오는 표현들을 통해 묵시문학의 진수를 함께 느껴보겠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